6시 반에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평소와 달리 두둑한 배낭을 메고 8시에 학교에 가서 독일어 수업을 듣고, 9시 반에 수업을 마친 후 10시쯤 Kempten Hbf 승강장에 도착했다.
얼렁뚱땅 기차 여행
여행 총정리 글에서 썼듯이 난 33유로짜리 도이칠란드티켓에 완전히 몸을 맡긴 일명 ‘도이치반 히치하이커’다 (방금 지어낸 말임). 고속열차를 제외한 오고 가는 아무 기차나 태워달라고 하면 태워주고, 안 태워줘도 뭐라 할 수 없는 포지션에 있다는 뜻이다.
갈 때는 운 좋게도 5번만 갈아타면 되는 루트가 있었다. 각 기차 당 1시간, 2시간, 2시간반, 2시간, 50분, 1시간40분 동안 갔는데 미리 할 거 분배해서 할 거 했다. 코딩하고, 소논문 과제를 위한 자료 읽고 모으고.
그 중 한 2층 기차에서 이벤트가 있었다. 나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기내를 돌아다니는 한 30대의 멀쩡해 보이는 여자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었다. DB 직원이거나, 종교 전도사거나, 구걸자겠거니 했다. 3번 구걸자가 정답이었다. 나에게도 차례가 왔고 여자가 내게 준 것은 손을 많이 탄 것처럼 보이는 코팅지 종잇조각 2개였다. 그중 하나에는 스마일리 뱃지가 달려 있었다. 다른 것의 앞면에는 독일어지만 대강 자신의 기구한 사정을 설명하며 3유로를 기부할 것을 요구하는 글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글 중간에서 Taub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여자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뒷면에는 수화로 기본적인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는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난 기부할 생각도 없거니와 현금도 없었다. 서울 지하철에서는 구걸자가 나눠준 종이를 나중에 다시 가져갔었고, 그래서 가져가라고 좌석 접이식 책상 위에 그냥 놔뒀다. 여자가 다시 돌아다니면서 수금을 하다가 내 차례가 왔고 내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홱 낚아채 갔다. 그리고 나를 향해 ‘붸뷉!’ 하고 소리를 지르고 순식간에 떠났다. 손으로 건네주지 않고 책상에 놔둬서 기분이 나빴던 걸까? 모든 사람이 기부를 하거나 종이를 공손하게 손으로 돌려주지는 않았을텐데 여자가 기내에 있는 사람들 중 나한테만 소리를 질렀다는 게 구렸다. 내가 아시아인이고 여자고 어리고 혼자라서 타겟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기차 여행 중 본 다른 평범한 승객들과 검표원들은 전부 친절했다. 콘센트가 보이는 족족 플러그를 꽂고 노트북/폰/보조배터리 중 하나를 충전하는 바람에 배터리가 닳을 일이 없었다.
- 할 거 하니까 시간이 빨리 갔다. 절반쯤인 5시간 가고 가족과 통화할 때 ‘체감상 1시간 지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도착했을 땐 총 5시간 정도 기차 탄 느낌이었다.
- 기차 안에만 있으면 내가 진짜 이동하는 건지 텔레포트하는 건지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다. 기차 시간표에서 익숙했던 지역명(Lindau-insel, Oberstdorf, München, Füssen, Fischen, Augsburg, Buchloe, Memmingen, Kaufbeuren, Kaufering, …) 들이 낯선 이름들로 대체되어 갈 때 내가 이동하는 감각만 느끼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됨.
Kempten Hbf
—Augsburg Hbf
—Nürnberg Hbf
—Saalfeld
—Halle Hbf
—Dessau Hbf
—Berlin Südkreuz
: 거쳐간 역의 이름들이다. - 이 블로그에 올리는 모든 사진에는 필터를 입히지 않았다. 저게 원래 색감이고 눈으로 보는 색은 더 강했다. 의도된 듯 극명한 색조의 대비, 선과 면의 컴포지션에서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치막 기차인 Dessau에서 Berlin으로 가는 RE3에서는 널따란 복도 좌석에 앉았다. 의자가 접힌상태로 벽에 붙어있고 직접 내려서 앉아야 하는 좌석 말이다. 거기 앉은 다른 승객들은 모두 젊은 남녀였고 인종이 다양했다. 소논문 과제 주제인 러시아어 diminutive에 대한 위키 사이트를 읽고 있는데 왼쪽 벽 좌석에 앉은 러시아인 남자가 호탕하게 큰 소리로 러시아어로 통화하고 있었다. ‘다~ 다~ 까녜슈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허공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이중에 오늘 나처럼 기차를 오래 탄 사람이 있을까? 가장 심하게 멍 때리고 있는 여자애 한 명은 큰 캐리어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꽤나 긴 하루를 보냈을 수도.
켐튼이나 뮌헨에서는 안 그랬는데 라이프치히, 베를린 쪽 기차에서는 표를 검사할 때 종종 여권도 요구했다. 전화하던 러시아인은 여권 안 가지고 있었어서 검표원과 몇 분동안 말해야 했다. 마침 그 복도 안에 다른 러시아어 말하는 여자가 있어서 갑자기 그 둘이 반갑게 대화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에 있다보면 독일어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언어들이 들린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 중 대부분이 독일어도 어느 수준은 하는 걸 보면 두 가지 이상의 문화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변론의 여지 없이 완벽한 Ausländer인 나와 비교되곤 한다.
환승에 주어진 시간은 각각 9분, 9분, 32분, 15분, 24분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한 번 기차가 원래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환승을 실패했고 그래서 예측한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베를린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어서 이 정도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5일 후 돌아올 때 2시간 이상 기다린 걸 생각하면 말이다.
베를린 첫인상
Berlin Hbf에서 내려야 하는걸 실수로 그 이전 역인 Berlin Südkreuz에서 내렸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대도시의 공기에 둘러싸였다.
- 가본 몇 개 안되는 독일 도시들 중 가장 서울과 풍경이 유사하다… 라는 생각을 하며 도착한 버스정류장.
- 여행하며 친숙해지게 될 역 이름들. 아직까지는 초면이었다.
- 승차할 버스정류장의 좀 뒤쪽에 또다른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버스기사님이 버스를 세워두고 10분 정도 쉬다가 시간에 딱 맞춰서 승차 정류장에 오신다. 나는 이때 모르고 멈춰있는 버스에 타려고 했는데 기사님이 손바닥을 세우며 pause라고 하셔서 기다렸다 탔다.
- Bayernring? 여기서 바이에른이 왜 나와?
- 가장 서울같다고 느꼈던 풍경. 다리 아래로 뻗은 여러 줄의 고속도로와 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자동차들의 밝은 헤드라이트들을 보라…
- Notfall. ‘비상’이라는 뜻. [놋팔]이라고 읽는다. 독일어수업에서 배웠다. Notausgang이 ‘Ausgang 아님’이 아니라 ‘비상 Ausgang’라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 낙서가 참 많다.
- 에스체트(ß)의 연결부분이 분리된 폰트를 표지판에서 처음 봄.
- 밤 10시 반인데도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고 자동차가 쌩쌩 지나다니고 행인들이 다니고 몇몇 가게가 영업하고 교회같이 생긴 건물에선 음악이 울려퍼진다.
숙소
내 숙소는 Hermannplatz 역 근처 Sonnenalle 6에 있는 Grand Hostel Berlin urban의 8인 혼성 도미토리이다. 1박에 약 20유로. 마지막 날 아쉬워서 다른 호스텔을 예약해서 하룻밤 더 묵었지만 일단 여기는 4박을 예약했다.
첫날답게 구글맵을 켜고 서투르게 숙소를 찾았다. 호스텔 건물은 위 사진처럼 밤에도 밝고 부산스러운 거리의 한 모퉁이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큰 건물이다. 간판이 크게 쓰여있어서 눈에 잘 띈다. 1층의 초인종 같은 버튼을 누르면 가장 바깥의 자동문이 열리고, 그 안의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운터 겸 바가 있다. 스태프는 약 3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카운터를 지키는 것 같은데 24시간 있는다고 한다.
체크인 하겠다고 하니까 내 폰으로 아고다 앱 확인 후 종이 폼을 줬고. 거기에 이름과 주소 등을 적어서 제출하고, 앱에서 결제한 게 무슨 세금이 포함되지 않은 가격이었는지 약 6유로를 더 내야 한다고 해서 구글페이로 결제했다. 그리고 내 방 호수를 적은 종이와 카드를 건네주며, 방에 들어가는 방법과 화장실 위치 등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침대는 아무거나 비어있는거 고르면 된다고도 말해 줬다. 카운터 옆에 객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거기에 받은 카드를 갖다대면 문이 열린다. 객실은 약 5층 정도까지 있고 6층은 식당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식당은 사용하지 않았다. 내 종이에 적어 주신 방 번호의 첫 번째 자리 숫자가 ‘z’ 모양이었는데 이게 대체 어떤 숫자인지 모르겠어서 다시 카운터에 가서 물어봤더니 4라고 다시 똑바로 적어 주셨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다. 4층에 올라가서 객실 문 도어락에 카드를 대니 찰칵 문이 열렸다. 벌써 불이 컴컴하게 꺼져 있고 조용해서 흠칫했다. 모두 자기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객실은 문 없이 연결된 2개의 큰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장실은 입구 쪽에 하나, 가장 안쪽에 하나 총 2개가 있으며 둘 다 남녀공용이다. 입구 쪽 화장실에만 샤워부스가 있다. 드라이기는 한 개 있으나 수건은 없다. 입구 쪽에 침대 갯수만큼 사물함이 있다. 2개의 방 중 입구쪽 방에는 콘센트가 있는 널찍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여러 개 있고, 이층침대가 한 개 있다. 안쪽 방의 한쪽에 이층침대가 한 개, 또 다른 쪽에 두 개 있다.
나는 2층침대를 써보고 싶었으나 2층 자리는 이미 모두 점유되어 있었다. 가장 안쪽의 1층 자리가 비어 있어서 소리내지 않으려 만전을 기하며 가방을 내려놓고, 내 침대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간단히 잠잘 채비를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후드집업 모자를 뒤집어쓰고 정자세로 누워 잠을 청했다.
내가 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니 다른 사람들의 부스럭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위층, 옆자리 사람이 이따금씩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자마자 어두웠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기회가 없어서 사물함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도난 방지를 위해 백팩 줄에 한쪽 팔을 끼운 채 백팩 위에 팔을 얹고, 중요한 것은 모두 작은 가방에 담아 이불 속에 지니고 잤다. 사물함이 한 사람당 두 군데나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쾌적하고 침대도 편했다. 감히 핸드폰 화면을 켜서 딴짓을 하거나 소리를 낼 수 없으니 10분도 안 돼서 잠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