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ing

2025-03-27

나는 기억할 수 있는 순간부터 그림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미술입시를 하고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디자인학과를 다니면서는 그림과 멀어졌다. 이것은 내가 ‘그림그리는 행위’에 대해 썼던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들어가며 - 2023년 12월 28일

몇 년 전부터 그림그리는 행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고 글로도 많이 적었다. 그림을 피해 다니다가 학교 일러스트레이션 동아리에 가입했다. 가입한 후로도 그림을 피해 다녔다. 일러스트레이션의 탈을 쓴 서체나 웹 작업만 했다. 그림을 직면하고 일러스트레이션 프로젝트(일러스트레이션 시리즈 타로카드)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작업을 하다가 막혔을 때 동생과 농땡이를 피우면서 아이패드에 번뇌를 담아 이런 걸 끄적거렸는데,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림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목적 없이 끄적거렸을 뿐인데 목적을 가지고 그린 것보다 생기 있게 느껴졌다. 이 그래픽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 그림과 그림에 대한 생각을 적은 글을 모아 보려고 한다. 지금은 그림에 대한 생각의 한 챕터가 어느정도 마무리된 느낌인데, 이럴 때 딱 생각을 마감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림은 표본이다. 그래픽디자인 수업에서 ‘생각은 시시각각 편집되기 때문에 글로 옮겨놓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글뿐만 아니라 그래픽에도 해당된다는걸 깨달았다. 예를들어 소설 '죄와 벌'을 주제로 레터링을 할 때 내가 도스토옙스키와 ‘죄와 벌’에 대한 해석 글을 한 줄 읽을 때마다 그래픽이 바뀌었다. 수업시간에 하는 발표의 내용도 함께 바뀌었다. 그래서 글이든 그림이든 뭐든, 연속적인 생각의 한순간을 포착해서 가둬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본은 움직이던 것을 딱 멈춰서, 또는 입체적인 것을 딱 단면으로 잘라서 플라스틱 조각으로 눌러놓은 것이다. 문법의 시제로 표현하자면 과거완료다. 생각과 느낌은 연속적이고 글과 그림은 그것의 표본이다. 글과 그림은, 딱 그 당시의 생각과 느낌을 멈춰서 잘라놓은 단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글과 그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표본을 어느 시점에서 만들지를 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깨닫자 완벽주의가 대부분 사라졌다. 원래 ‘완성’이란 건 없고 표본을 만든 뒤에 남은 생각은 그냥 흘러가게 냅둬야 하는 것이다.

내게 그림 그리는 게 왜 어려운지, 그럼에도 그림을 그릴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왜 그림에서 서체 작업으로 넘어갔는지 등에 대한 당시의 생각들의 표본을 진열해 놓았다. 그때 만들기를 끝낸 표본이니까 수정은 거의 안했다.

나의 마지막 그림들은 옛 인스타그램 계정 @s0lrni에 보관되어 있다.

2022년 3월 7일

나의 카메라는 언제부턴가 초점이 잘 안 맞는다.. 캐릭터 디자인에 관심이 떨어졌다. 내 그림에서는 이제 사람이 주요 피사체가 아니다. 모델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찍어라?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를 돌려 허공에다 대고 셔터를 눌러대자.

2023년 7월 27일

그림 안 그리기의 부작용 : 미적 관념, 손과 눈과 머리의 협동 능력 등이 희미해진다.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 나의 감각과 미적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 손과 뇌의, 미적 합의이다. 내가 내 그림의 완성도와 독창성을 신경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게 디지털 인물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 덕질을 넘어 있었다. 물론 꼭 인물을 그릴 필요는 없다. 몇 개월 전 그림을 그만둔 것도 인물 사실적 묘사하기, 모델 선정하고 꾸미기에 신물이 나서였을 정도니까. 하지만 역시나 인간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때 동기부여가 되고 생기가 있다.

2023년 5월 ??일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순간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게 고통이었다. 일시적인 슬럼프라 생각했지만 그 후로 몇 점 빼고는 완결된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그 몇 점마저 어려움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새로운 스타일을 찾겠다며 동아리에 들어왔는데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것 같다.

중학생 때의 나는 애니메이션과 스스로 만든 캐릭터들에 심취해 있었고 따라서 구체적인 것, 분류와 시대적 양식이 필요했다. 반면 아주 어릴 때는 어린이 그림들이 다 그렇듯 추상적인 기호처럼 그렸다. 기호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중학생 이후 캐릭터에 관심이 식고 추상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욕심이 생겼을 때, 어릴 때와 달리 내 그림은 한껏 구상화되어 있었다. 생각도 더 구상적, 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괴리감이 생겼다. 이제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에 등장하는 인간은 주로 그의 머리 색깔이나 눈 모양, 옷 스타일이 아니라 느낌과 정신이었는데 그걸 구상적인 그림으로 그리려니 새로 만들어 채워 넣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았다. 각종 인체비례와 옷 스타일 같은 걸 조사해서 정보를 채워넣다 보면 ‘이건 내가 그리려던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하던 은유를 빌리자면 ‘모델이 사라졌다’. 보고 그릴 게 사라졌다는 뜻이다. 귤 까먹으며 바닥에 엎드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어릴 적의 나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는지 과거로 돌아가서 묻고 싶었다.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뀌었는데 여전히 예전의 틀 안에 넣으려 했던 것이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려웠지만 낙서는 여전히 즐거웠다. 패턴 같은 것을 그리곤 했다. 펜과 종이가 닿는 느낌, 종이와 잉크 부분이 만들어내는 모양을 즐기는 것이 다였다. 그 안에 색과 면으로 함축하는 거다. 여전히 느낌을 완벽히 담아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전의 의무의식으로 쓸데없는 표현을 채워넣던 이전보다는 효과적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앞으로도 취미일 것이다. 자기만족용일 것이고 분출구일 것이다.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탈환했다.

2023년 6월 22일

그림 그리기 싫음을 인정했다.

난 그림 그리기와 낙서하기는 좋아하나 일러스트레이션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디자인의 영역에 끌고 들어올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나는 목적을 가진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나에게 그림은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에게 그림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림은 곧 그것의 촉각과 시각이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다.

2023년 8월 6일

그림을 그려버릇하면 그려진다. 안그려버릇하면 안그려진다. 점점 게을러지고, 조급해진다. 경계가 없고 뭉개진다. 구상화를 그리다가 추상화로 넘어간 화가들도 나처럼 ‘귀찮음’이 조금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림 귀신이 날 붙잡고 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물론 매 순간 그림그리기에 대해 이렇게 집착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분이다.

2023년 8월 27일

타로카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도저히 안 그려져서 삘을 얻기 위해 주말에 날 밝자마자 한시간동안 버스타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하루종일 그리기도 햇지만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다. 종강하고 나서도 하루, 일주일, 한 달.. 계속 뒤로 미루다가 결국 포기하게 됐다.

난 왜 일러스트레이션 시리즈를 완성할 수 없었을까?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날 도서관 지하에서 빈백에 누워 하루종일 내가 한 것을 생각해보니 나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과 획을 즐기는 것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획을 즐긴다는 것은 획을 그음으로서 색이 어떻게 섞이거나 대비가 만들어지고 어떤 형태가 생겨나고 이런 걸 관찰한다는 거다. 획을 즐기려면 계속 그림을 조금씩 바꾸게 되고 전체그림은 예측하지 못한 길로 빠진다. 시간 가는 것도 잊은 채 획을 긋고있는 나를 발견하면 스스로에게 왜 완성 안하고 덧칠만 하고 있냐며 독촉하기 시작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완성하는 제대로 된 방법도 모른 채 조급하게 흐릿한 완성을 향해 달려가다가는 곧 길을 잃는다. 그때는 창작의 신을 욕하며 펜에서 손을 떼던가 다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덧칠 삼매경에 빠지던가 둘 중 하나이다.

스타일이 정립이 안되고 계속 바뀌는거, 그릴때 결과로 직행하지 않고 덧칠하며 빙빙 도는거, 고질병이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입시미술할때 왜 물감을 파레트에서 안 섞고 도화지 위에서 섞고있냐고 많이 혼났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이해되고 앞으로.어떻게 해야할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이냐면… 먼저 그림은 무엇인가? 그림이라는 행위는 b를 a에 문대 a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림을 감각으로 생각한다면, 시각 촉각 청각으로 구성되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목적이다. 따라서 그림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목적으로서의 그림을 즐긴다.

예를 들어, 묘사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도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획의 강약과 길이, 각도, 색을 컨트롤하며 느낀 감각이 준 즐거움이다. 미술학원에서 전시를 위한 모작을 한 적 있다. 즐거웠다. 물감으로 색을 칠했다. 붓이 지나가는 곳의 색이 부드럽게 섞이는 것을 보았다. 붓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를 들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결과물은 정작 레퍼런스와 다를 바 없엇으므로 완성해 붓을 떼자마자 그 그림은 가치가 없어졌다. 인기투표를 했는데 많은 표를 받았다. 완성작에 애정이 없었으므로 그것은 딱히 즐겁지 않았다.

결과(커뮤니케이션)를 생각하고 거기로 곧장 내닫는 것 즉 수단으로서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목적으로서의 그림, 즉 감각을 찾아 헤매는 것과는 다른 프로세스였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일러스트레이션 시리즈를 완성하려면 결과로 가는 방벚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결과로 직행하는(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계속 나와 내 그림 안에서 감각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것. 둘이 서로 다른 거라는걸 인지하지 못했다.

타로카드를 그리면서 나는 소위 말하는 삘feel에 의존을 많이 했는데 그 삘이란, 즐거움을 주는 그림의 감각이었고. 그것만이 그림을 그리는 동기고 그것을 따르면 결과물이 잘나온다는 틀린 명제를 맹신한 나머지 그렇지 않은 현실에 좌절했던 것이다. 왜 그렇지 않을 수밨에 없었느냐. 결과물에 대한 생각(판형은 이래야 하고 여백은 이정도는 돼야 하고 색은 예뻐야 하고 어쩌고)이 감각을 방해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전히 삘이 그림을 그리는 가장 큰 동기인 나는 그럼 어떡하란 말인가? 삘로는 소통할 수 없으니 그림 능력을 썩혀? 그림과 내가 공생할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번 귀납이 아니라 연역의 방식으로 그림을 이용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뒤에 놓는 게 아니라 앞에 놓는 것이다. 일단 즐겁게 감각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고, 거기서 뭔가 다른 걸 도출하는 것이다. 단 그 도출은 삘에 의존하면 절대 안되고(그럼 또 덧칠의 무한 굴레)방법론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내가 낙서에서 타입을 도출하던 방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타입type은 글자가 아니라 규칙이라는 뜻이다.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타입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림 놀이를 한다. 준비물은 종이와 무언가다. 그림그려야 할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면 더욱 좋다. 새로운 감각을 만드니까. 그림은 b를 a에 문대 a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준비물을 이용해서 시각 청각 촉각을 즐긴다. 신체구조상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이동이 아닌 것을 찾는다. 더 새로운 시각 청각 촉각을 생산하는 것이다. 선의 특정 리듬이 재미있으면 반복한다. 그러면 타입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유희를 하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린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느낌이 있다. 그걸 질리도록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규칙이 정립된다. 그 규칙은 아주 복잡미묘한 감각이라서 글로 설명이 안된다. 그냥 손가락 근육 안에? 내재되어 있는 거다. 어쨌든 그러면 타입이 된다. 이렇게해서 그림에서 타입이 나오는 것이다.

2023년 9월 3일

타로카드 일러스트를 그리려다 좌절하기를 반복하면서 왜 그림이 이렇게 어려워졌나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게 있다. 왜 그림이 안그려질까? 입시미술할때나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막힐 때마다 나의 고질병이자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림 스타일이 정립이 안되고 계속 바뀐다’, ‘완성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덧칠하며 빙빙 돈다’ 따위의 것이었다. 입시미술을 하는데 계속해서 끌리는 대로 덧칠하다가 급기야 그게 어떤 물체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변형되기도 했다. 낙서 또한 점점 추상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도 결론을 내리려 애썼다. 막연히, ‘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싫은거야’, ‘화가는 당연히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거야(?)’, ‘비현실적으로 높아진 기대치를 실력이 더이상 못 따라가서 그래’ 등등.. 전부 시원찮은 결론들이었다. 근데 이제 진짜로 알 것 같다.

그림 한 편을 빠르게 완성할 때와, 목적없이 낙서할 때의 즐거움은 확연히 다른 종류였다. 그 둘을 묶어서 ‘그리기’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단어를 붙여줄 수도 있을 만큼. 빙빙 돌고 있을 때, 그리고 목적 없이 낙서할 때 나는 새로운 획 만들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 새로운 획이 즉각적으로 주는 시각 청각 촉각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른데도, 나는 낙서할 때처럼 그저 감각에 충실하면 반드시 좋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나온다는 잘못된 명제를 맹신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한 획 한 획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삘’이 안 오면 서둘러 그만두고, 그림이 빙빙 돌며 완성되지 않고 남들이 내가 의도한 것과 너무 다르게 받아들일때마다 좌절했던 것.

그러면 그 낙서의 과정에서 뭔가 유의미한 것을 도출해볼 수는 없을까? 낙서하다가 마음에 드는 규칙이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곤 했다. 그게 결국 타입이잖아? 그러다가 그 규칙을 가지고 글자를 그리기도 했다. 그게 결국 폰트잖아? (내가 왜 서체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겠군) 마침 서체를 더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그림에서 타입을 도출해보자.

끝맺음 - 2023년 12월 28일

위에 써놓은 작년부터의 글을 읽어보니 대충 하는 말의 핵심은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이전에 쓴 글을 긁어와서 수정만 하기도 했다) 주장의 근거나 디테일, 쓰는 단어 따위가 계속 달라지고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에 영향을 받은 것도 보여서 재밌다.

그림은 지진계 같아서 그림을 그릴 당시의 감정에 생각보다 훨씬 많이 좌지우지된다. 긋는 획이 투박해지거나 섬세해지고, 힘이 고르게 들어가거나 탄력적으로 변화한다. 선이 노련해지거나 불규칙하게 떨리고, 모서리가 각지거나 둥글어진다. 획을 보면 그것이 그어진 순간의 성급함, 몰입, 무기력 등이 어느 정도 전달된다. 재미없는 수업을 들으며 교과서에 펜끝을 대고 목적없이 손을 놀릴 때만 나오는 번잡한 획은 절대로 캔버스나 4절 도화지 위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행동은 그래픽과 감각 사이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감각적 그래픽을 만드는게 어렵고 구조적으로만 접근하는 데 질린다면 다시 그림 그리기를 가까이 할 때이다. 예를 들어 요즘 나는 코드로 그래픽만드는 데 시간을 쏟는데 그러다보면 이미 다른 개발자들이 만들어놓은 api의 디자인에 휘말려, 그리고 내가 코드로 만들 수 있는 범위의 그래픽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내가 주도적으로 그래픽의 세세한 부분을 컨트롤하지 못하게되는? 나와 그래픽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와 그래픽 사이를 떨어뜨려놓는 ‘도구’라는 걸 좀더 꿰뚫어보기 위해서 배우기 시작한 건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 있다 해도 그림을 그릴 마음이 안 들면 안 그릴 거다. 이제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만 그림을 그릴 거다.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안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