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n
language
music

2025-03-29

러시아어는 내 의지로 배우기 시작한 최초의 외국어이다. 내 800일이 되어가는 듀오링고 역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어지만 배웠다고 말하기 무색하게 다 까먹어 버린 지금… 더 희미해지기 전에 내가 러시아어를 공부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놓으려 한다. 지금은 과거완료 시제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가 외국어를 접한 경로는 대부분 음악이다. 러시아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의 씨앗을 나도 모르는 새에 뿌려놓고 간 것 또한 음악이었다.

IC3PEAK

고등학생 때 한창 인스타그램에서 그림 계정을 할 때 외국 그림 계정들의 스토리를 통해 알음알음 러시아어로 된 노래들을 듣게 되었다. 스포티파이가 한국에서 서비스하기 전이었는데 외국인들이 그렇게 올리는 것을 통해 노래를 건지곤 했다. 이때는 언어에 대한 생각은 딱히 안했다.

t.A.T.u

역시나 고등학생 때, 유튜브로 음악 디깅과 유사한 행위를 하는 게 취미였는데 그렇게 디깅한 것들 중에 Evarose - All the thing she said 커버곡이 있었다. 호기심에 원곡을 찾아봤는데 t.A.T.u라는 러시아 2인 그룹의 노래였다.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1도 없었기 때문에 외계어처럼 들렸는데, 그 외계어같음과 구개음화와 된소리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알파벳도 몰랐지만 그게 구개음화의 소리인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просты, когда 같은 자주 쓰이는 단어의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의미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눈 올 때 들었고, 뮤비에 눈이 나왔고, 원래 러시아 하면 추운 게 스테레오타입이니까 이때는 러시아어를 ‘겨울’, ‘추위’의 심상과 연관지었다.

그룹에 대한 스캔들도 재밌어서 관련 영상을 자주 찾아봤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이 tatu 관련 영상으로 도배되었었다. 러시아어 발음의, 특히 율리아의 약간 툴툴거리는 것 같은 또르륵 또르륵 굴러가는 듯한 발음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많이 쓰이는 부사(очень), 대명사(Меня, Тебя, …), 의문대명사(Что, Почему, Где) 같은 게 귀에 익었다. 역시나 의미는 대부분 모르는 채로…

Молчат Дома

사람냄새 나는 음악을 피했던 적이 있다. 원래 좋아하던 음악도 가사가 들리거나 좀 인간적으로 느껴지면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어서 못 들었었다. 이건 괜찮아서 이 앨범만 돌려 들었었다. 그 당시에는 Молчат Дома의 음악이 무척 차갑고 중립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키릴문자를 하나도 못 읽던 때였다. 그래서 Этажи 앨범을 돌릴 때 각각의 노래 제목을 그래픽으로 인식하고 그 그래픽과 노래의 소리를 대충 매치해서 인식했었다. 예를 들자면 ‘이 모양의 노래는 좋은 노래’, ‘이 모양의 노래는 신나는 노래’ 이러다가 앨범의 모든 노래가 좋다는걸 깨달았다.

기하학적인 글자모양과 뚱땅거리는 음악을 연결지어 생각하기 시작했고, ‘-ое’ ‘-ю’ 같은 어미들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런 어미들 때문에 뭔가 외국어인데 이상하게 우리나라 말의 사투리같이 구수하게 들린다는 걸 느낌.

이후로 기계적이고 춥던 첫인상에 사람냄새가 추가될수록 매력을 느꼈다.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 다른 덕질의 대상도 항상 흐름은 비슷하다. ‘정’이 한 번 강력하게 다가오고, 그걸 깨는 ‘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오고, 그 ‘합’으로 뭔갈 배우는 것의 연속이다.

반복되는 가사들이 귀에 때려박혔다.

< 니깍다니우몌롙! > Молчат Дома - Судно

Никогда не умереть
Никогда не умереть
Никогда не умереть
Никогда не умереть

< 야 니 우메유 딴세밭ㅊ > Молчат Дома -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Я не умею танцевать

< 믜니 악툐릐.. 믜니 이그라옘.. > Молчат Дома - Фильмы

Мы не актеры, мы не играем
Мы не режиссеры, мы фильмов не снимаем
Мы не актеры, мы не играем
Мы не режиссеры, мы фильмов не снимаем

Альфа

대학 입시가 끝나고 입학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짧은 공백기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입시와 십대가 하루아침 사이 끝나 버렸다는 사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하루종일 이불 속에서 음악만 들었다. 사람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놓이면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곧바로 눌러앉는다. 그렇게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진다. 러시아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왜 갑자기 하필이면 러시아어에 관심이 생겼는지 그 당시에는 더더욱 설명하기 어려웠다. 언어를 배우겠단 생각은 이때부터 생겼던 것 같다.

위 유튜브 채널을 발견한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80년대 러시아 락은 십대와 이십대의 경계선 붕 떠 있던 짧은 시기를 비집고 들어온 특이점이었다. 외계어같음, 투박함, 이상함, 기묘함, 낯설음 사이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낯익음 친밀감? 이게 당시 느낌이었다. 채널주가 자막을 노래에 맞춰 다양한 폰트로 쓰고 썸네일도 노래에 맞춰 넣음. 세기말 일본 애니(주로 에반게리온) 썸네일과 레퍼런스 + 소련 락이라는 기묘한 조합도 양쪽에 전혀 무지하던 나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이때쯤 듀오링고를 시작해서 알파벳을 배웠기 때문에 다양한 의문이 생김. 왜 т를 m처럼 쓰지? 그리고 영상 설명란에서 한국어발음도 가끔 볼 수 있는데 тело를 ‘텔로’가 아니라 ‘쩰라’라고 읽어? 대체 왜? 왜 г가 v처럼 발음되지?? 이런식. 아 그리고 ы 랑 ю 발음도 기묘하게 한국어와 겹쳐 들리면서 신기햤다. люблю 같은 특정 단어의 리듬이 귀를 사로잡았다. ‘사방’을 나타내는 단어에 четыре가 들어간다는 사실 같은 예상치 못한 우리말과의 공통점도. ‘как’, ‘ты’ ‘тогда’ ‘точка’ ‘только’ 이런 발음 너무 귀엽고…

이 언어에 대한 그 당시의 내 느낌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충격’이었다.

메탈을 주로 올리시지만 난 메탈은 나이트위시같이 멜로디 있는 것만 가려먹어서 잘 안들었다. Альфа, Рок-Ателье, Наутилус Помпилиус, Арсенал 등 락, 시티팝, 전자음악을 주로 들었다.

Кино

맨위의 아이스픽도 듣기 전부터 ‘혈액형’을 포함한 키노의 가장 유명한 몇 곡은 좋아했다. 러시아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키노에 대한 영화 ‘Leto’를 봤는데 밴드의 초기 시절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초반부 앨범도 듣게 되었고 그 영화와 소설 ‘죄와 벌’의 영향으로 기존의 느낌과는 정반대인 ‘여름’, ‘더위’ 심상과의 연결고리가 생겼다.

듀오링고 중독기

듀오링고와 Busuu라는 언어 앱을 깔아서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뒷전이고 스트릭이 오늘내일 하지만 그때는 정말 미친 듯이 했다.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리그 일등 찍는 건 기본이고 방학에 하루종일 폐인처럼 듀오링고만 붙잡고 보낸 날도 꽤 된다…

알파벳을 떼고 단어들을 많이 배우고 문장구조도 익혔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일단 주어랑 목적어 사이 아무것도 없는게 되게 깔끔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좀 어려웠던 건 듀오링고가 문법 설명을 전혀 안해준다는 거다. (사실 좀 했을수도 있는데 내가 넘긴 걸수도?) 소유를 나타내는 문장이 y 로 시작하는거랑 동사들이 주어에 따라 어미를 바꾸는 게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듀오링고 중독 시기를 거치고 나니까 찰싹 달라붙어서 나중에 러시아어 수업 들을 때 암기 부담이 거의 없었음.

하드베이스

왠지 모르겠는데 한 일주일정도 중독돼서 맨날 들었음…

소비에트웨이브

소련과 역사에 흥미 약간 생겨서 관련 교양 ‘문명과 세계화의 도전’과 ‘맑시즘의 이해’를 듣는 계기가 됨… 하지만 역사덕후나 공산주의자까지는 되지 않았다.

애니

(스쳐지나간 카츄샤)

문학

죄와벌 읽음. 디자인수업에서 포스터만드느라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논문도 몇 개 읽었는데 재밌었음. ‘톨스토이 단편선’, '죽은 혼', ‘체호프 단편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도 읽음.

러시아어 수업

우리학교 러시아학과의 ‘러시아어II’ 수업을 수강함. 선수과목 ‘러시아어I’ 내용은 방학때 교재로 공부함.

  • 암기보단 ‘아 그래서 그랬구나’의 연속이었다.
  • 러시아아와 급속도로 친밀해졌다(내적 친밀감). 더이상 외계어처럼 들리거나 외계문자처럼 보이지 않게 됐다. 그리고 필기체를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키릴문자 서체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영화와 책

영화 몇편 봤는데 언어에 도움되는 걸 봤으면 좋었겠지만 하필 괴상한 것들을 봐서 ‘이상하다’ 만 심화됨.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러시아 예술(아마추어 언더그라운드 록밴드, 네크로리얼리즘 영화, 부조리 유머, …)과 전반적으로 내가 느끼던 ‘이상함’에 대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책이었음.

지소형(diminutive)에 대한 얘기가 흥미로워서 더 알아보려고 러시아 언어 문화라는 책도 읽음. 욕설에 대한 내용도 있음. 아래는 이디시어 얘기지만 재밌어서 찍어놓은거…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잦고 그게 언어에도 드러나서 간접화행 Вы можете открыть окно? 보다 직접화행 Откройте окно, пожалуйста! 을 선호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언젠가 다시…

내가 러시아어에 대해 느끼는 장벽은 보통의 편견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어떤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 몇천명이고 20시즌이 넘고 골수팬들이 많다고 치자. 관심 없는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런 방대함은 장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라면? 그 방대함이 덕질의 지속가능성과 비례한다. 비슷한 거다. 빙산의 일각의 가장 위 끄트머리에 앉아 있지만 불안한게 아니라 든든하다. 문법이 복잡해서 좋다. (사실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복잡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어쨌든, 나는 러시아어 방식의 복잡함을 좋아한다.)

지금은 독일에 왔으니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독일어 단어를 한 개 외우면 러시아 단어를 한 개 까먹는 기분이다. 어쩔 수 없이 러시아어는 일시중단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배우게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