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ing

2024-10-07

메모앱 옮겨다님의 역사

나는 유치원 때 일기장에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쭉 일기를 써왔다. 삭제하지 않고 한 곳에 축적하기 시작한 건 2020부터. 메모 앱을 참 많이도 옮겨다녔다.

메모앱을 옮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 초등학교 때, 폰을 바꾸는데 메모 옮기는 법을 몰라 강제적으로 이동함
  • 초등학교 때, 실수로 메모를 포맷해 버리는 사고를 겪음. 이때 며칠동안 후회와 절망에 사로잡혀 잠도 안오고 밥도 안 넘어갔다. 트라우마를 안고, 삭제가 한 번에 되지 않는 메모앱으로 옮겼다. (과연 그 메모앱이 정말 백업방법이 없는 앱이었을까?)
  • 중학교 때는 기본 메모앱에 뭉탱이로 쓰고 뭉탱이로 삭제하는 것을 반복했다.
  • 고등학교 때 어느 순간 문득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기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에버노트 시대(2021-2023)

에버노트를 쓸 당시 일기앱으로 쓸만한 앱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 모바일로 접속, 쓰기, 읽기, 검색 편리
  • 오프라인 접속 가능, 하지만 동기화는 빨리빨리 되어야됨
  • 옆으로 누워서 사용하기 편함(화면 자동 회전되면 안됨)
  • 읽기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치거나 예측을 빗나가지 않는 타이포그래피와 이외의 디자인
  • 영구삭제가 어려움, 그렇지만 삭제하면 확실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야 함.
  • 잠금 기능, 그렇지만 너무 풀기 어려우면 안됨
  • 계정은 있어야 함, 그러나 너무 강하게 연결된 느낌이면 안됨
  • 무료여야 함. 돈까지 내긴 싫음. 하지만 무제한 노트생성 가능과 함께 내가 원하는 모든 기능이 있어야 함.

등등?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다른 요소들도 있다. 이렇게 까탈스러운 조건을 들이밀면 충족하는 앱은 거의 없다.

에버노트는 내가 쓰는 동안만 해도 꽤 여러번 업데이트가 되었고 기능과 디자인이 바뀌었다. 물론 마지막 모습보다 이전의 버전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에 적응해야 했지만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기를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지금은 안그렇지만 당시에는 중요도가 큰 루틴이었고 나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일기 앱의 디자인에 있어서 모험을 꺼렸던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꽤 오래 사용했던 에버노트를 떠나기 어려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1-2년쯤 전 에버노트를 떠났다. 이유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사용하던 일기앱을 버렸다는 건, 정말로 봐주고 봐줘도 못 써먹을 수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 이상 내가 일기앱을 바꿀 리가 없다.

기억나는 건

  • 광고가 너무 많아졌다
  • 모바일에서 계속 자동회전이 되고 그걸 막을 방법을 제공하지 않는다
  • 모바일에서 무한로딩 에러가 잦아졌다
  • 노트 저장이 느려졌다
  • 노트 충돌? 에러가 잦아졌다
  • 무료 플랜 노트 50개 제한

에버노트 대체제 찾기를 위한 과도기(2024)

그래서 에버노트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일단 디지털이어야 한다. 초등학교 일기장 이후 쭉 디지털을 고집했던 이유는 디지털 방식이 적은 노력으로 확실한 프라이버시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텍스트를 중간에 추가하고 편집하고 삭제하기 편리하다.

원노트, 업노트, 굿노트, 구글독스, 깃허브, 노션, 옵시디언 등등 수많은 노트앱 후보들이 있었다. 그중 몇가지는 몇 개월 정도 시험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내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다.

노션, 옵시디언, 업노트는 일기가 아닌 다른 용도로 잘 쓰고 있다. 업노트에도 노트 갯수 제한이 있지만 일기보다 상대적으로 금방 만들고 금방 삭제하는 임시 메모(발표 개요, 프로젝트 기획, 투두, 공부기록 등)용으로 사용하기에는 괜찮다. 구글독스는 에버노트에서 사용했던 타이포그래피 요소들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아 불편했고, 양이 많아지니까 메모리 사용량이 많아지고 컴퓨터가 느려졌다.

그 외에도 어떤 것은 계정과의 연관성이 너무 강해서, 어떤 것은 무료버전이 제한적이어서, 어떤 것은 오프라인 접속이 어려워서, 어떤 것은 읽기 어려워서, 어떤 것은 작은 회사라 데이터가 날아가거나 보안이 약할까 두려워서, 어떤 것은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같은 끝이 없는 이유가 나와서 적절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완벽한 앱을 찾는다 해도 에버노트처럼 나중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업데이트되거나 서비스가 종료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는다 해도 나의 요구사항에 무슨 변동이 있을지 모르고 언젠가는 다시 이주하고 싶어질 지 모르는데 앱들마다 각자의 고립된 타이포그래피 신택스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노트앱 A에서 노트앱 B로 텍스트를 복붙한 뒤 그걸 다시 노트앱 A로 복붙했을 때 다르게 보인다면 타이포그래피가 깨지는 거다.

여기까지 다다르자 결국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앱을 만든다면 내가 필요한 기능을 나중에 추가하거나 수정할 수 있고, 수정한다 해도 마크다운 포맷을 사용한다면 타이포그래피를 본문을 건드리지 않고도 보존할 수 있다.

직접 만들자

예상하는 사용 패턴

  • 편집 빈도: 약 1-2달에 한 번(다른 메모앱을 임시저장용으로 사용)
  • 읽기 빈도: 약 2-3달에 한 번

원하는 기능

  • 나에게 익숙하면서 나에게 유리잔과 같이 투명하게 인식되는(=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타이포그래피
  • 가장 보편적인 타이포그래피 신택스(=마크다운)
  • 개발에서의 미니멀함, 작은 용량과 빠른 속도, 유지보수 편리
  • 디자인의 미니멀함. 단순한 조작
  • 개인정보 보호: 서버에 올리지 않음(반쯤 아날로그인 셈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용했던 아날로그, 디지털 도구들의 중간에 위치하는 무언가가 됨)

필요 이상의 노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전보다 옛날 일기를 덜 읽고, 일기를 쓰는 시간 또한 줄어들었다. 그래서 일기는 그냥 내가 필요할 때에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되어서 거기에 있으면 되었다. 일기앱을 옮겨다니다 보니 이제서야 껍데기가 벗겨지고 데이터 자체가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동안의 전통을 존중함과 동시에 덜어낼 건 확실히 덜어낸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전통 존중

  • 에버노트를 닮은 디자인 - 키 컬러, 다크모드, 산세리프, 서체 크기, 글줄길이와 행간
  • 정리방식 - 달을 기준으로 페이지 나눔, 날짜 포맷은 ‘월.일’, 연도 기준 폴더 나눔, 꿈일기와 보통 일기 분리

덜어낸 것

  • live server로 열기 때문에 모바일 접속을 내려놓았다.
  • 심화 검색기능: 키워드 검색 기능은 만들지 않았다. 대신 vscode로 열면 검색할 수 있다.

아쉬운 점

  • 마크다운은 한줄을 비우거나 글 뒤에 띄어쓰기 두 개를 붙여야 단락이 구분된다.
  • 마크다운은 2줄을 비워도 100줄을 비워도 한 줄 비운 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내가 단락과 단락 사이에 의도록으로 크거나 작은 공간을 만들었던 것을 보존할 수가 없다. 순수 텍스트에는 보존되어 있지만 마크다운 스타일을 입힌 뷰어에서는 전부 한 줄 띄움으로 보인다.

Journal Shrine이 그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