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침일찍 눈이 번쩍 뜨여서 짐은 다 사물함에 잠가 놓고 가벼운 몸으로 숙소를 나왔다. 이제 익숙해진 Hermannplatz 역의 minimarkt에서 궁금했던 음료수를 샀다. 위 영상의 8분 30초쯤에 나오는 작은 키오스크이다. 켐튼의 한 아이스크림 집에서 Waldmeister 맛의 아이스크림이 맛있었어서 음료수는 어떨지 궁금했다.
맛있었다.
Berlin Wall Memorial
Berlin Wall Memorial에 갔다. 베를린 곳곳에 장벽의 잔해가 있는데 이곳도 그 중 하나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의 장벽과 장벽 사이의 붉은 쇠 막대기들은 장벽이 있었던 곳을 표시하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장벽으로 가로막힌 시야를 터주는 조형물이었다. 맑은 날씨에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면서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개를 데리고 와서 뛰어노는 주민들이 가끔씩 보였다.
- 잔디 바닥에 세로 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전하면서 그게 있었던 자리를 표시하는 의미로 세로 줄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Nordbahnhof의 벽 한 쪽에는 Ghost stations라는 전시가 있었다. 기차를 잡아야 해서 보지는 못했지만 이 역도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기차를 타고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에 도착했다. 길 이름이 한나 아렌트 길이었다.
베를린 여행을 하다 보면 유대인 박물관의 건축도 그렇고, 아까 장벽이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없어진 자리를 채우고 있는 조형물도 그렇고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건축물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 공간에 대해 읽었던 것 중에서는 ‘멀리서 봐도 눈에 확연히 띄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조감도를 보면 그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조형물 안쪽으로 들어가서 걷다 보면 왼쪽 사진에서 오른쪽 사진으로처럼 딱히 의식하지 못한 새에 점차 바닥이 꺼져서 콘크리트 육면체들 사이 파묻힌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들어가기 전 밖에서 볼 때는 예상하기 어려운 시야다.
인물을 나타내는 명사에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귀찮지 않은가? 나 같으면 ‘in’ 붙이는 규칙은 무시하고 그냥 남성형을 보통명사로 쓸 것 같은데. 그 문법 규칙 때문에 만들어진 Kolleg:innen 같은 표기법을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독일에는 비둘기가 앉을만한 대부분의 공간에 뾰족한 철바늘들이 깔려 있어서 이렇게 비둘기들이 팔자좋게 모여앉아 있는 광경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내가 이런 사진을 찍어 놓은 것 같다.
화상회의를 하기 위해 다시 숙소에 들렀다. 호스텔 카운터를 가로질러 입구의 반대편으로 나가면 이런 공간이 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비둘기 한 마리를 보았다. 저 막대기를 물고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뜨리고 다시 내려와서 막대기를 물고 올라갔다가 떨어뜨리고 다시 물고 올라가는 행동을 시시포스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Die Berliner Mauer
Die Berliner Mauer에 갔다. 기차역에서 나와서 조금 걸으면 The Wall Museum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슈프레 강을 따라 가다 보면 장벽이 나온다.
조금 더 걸으면 East Side Gallery가 나온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와 호네커가 Bruderkuss를 하는 벽화 ‘Mein Gott, Hilf Mir, Diese Tödliche Liebe Zu Liberleben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이 치명적인 사랑에서 살아남도록)’ 앞에는 역시나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슈프레 강과 박물관의 모습이다. 박물관은 유료 입장이다. 날씨가 정말 좋은 날이었다. 탈출하려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던 붕괴 전과 비교하니 더 평화롭게 느껴진다.
Berlin-Hohenschönhausen Memorial
웹사이트에서 미리 2시 40분 Public tour를 예약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 갔다. 학생할인으로 2.5유로였다.
- 건물에 들어갔더니 투어 신청했으면 카페에 있으면 된다고 해서 앉아서 기다렸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이 많았다. 그런데 읽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간이 되자 다같이 영상을 보는 방으로 들어가서 내 기억으론 약 20분짜리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가이드가 두 명 와서 두 팀으로 갈라졌다. 한 가이드가 약 10명 정도를 인솔했다. 우리 가이드는 네덜란드에서 오신 젊은 여자분이셨다. 호헨숀하우젠 감옥의 미니어처를 빙 둘러싸고 모여서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고 가이드가 시작됐다. 감옥 옆에는 군부대가 있었고 그 옆에 바로 일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래서 대부분 감옥 시설 전체가 부대시설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공무원들은 한 번 감옥에서 일을 시작하면 사퇴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국가보안부인 Stasi가 ‘정치범’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수감되는 이유는 동독 반대파, 동독을 탈출 시도 등도 있었지만 전혀 상관도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도 있었다. 한 14살 소녀 Erika는 학교에서 스탈린 사진의 콧수염에 리본을 그려 넣는 장난을 쳤다가 밀고당해 8년간 수감당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Die Schleife an Stalins Bart(스탈린의 수염에 달린 리본)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다 가이드가 알려준 거다.
- 다양한 감옥 방들 중 하나다. 저 나무판은 침대이다. 저 좁은 방에 여러 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고 변기 하나만 두었다. 사진은 없지만 어떤 방은 천장, 바닥, 벽이 전부 푹신한 재질로 되어 있었고 전부 까맣고 어두웠다. 방음과 자해 방지를 위한 것이었다고.
- 복도.
- 서 있는 방이라는 것도 있었다. 말 그대로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고문을 하는 방이다.
어떤 식으로 고문했는지 매우 자세하게 알려준다. 창문을 없애 밤낮 구분과 시간 감각을 상실하게 했고, 문에 난 구멍을 통해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았다. 수감자들끼리 벽을 쳐서 소통하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해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 독방에 있는 수감자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같이 수감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자신 이외에 누가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었다. 저 신호등도 그걸 위한 도구다. 수감자가 복도에 나와야 할 때는 빨간 불을 켜 건물 전체에 알려서 같은 시간에 다른 수감자가 복도에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복도의 끝에 있는 문에 구멍이 있길래 들여다 보았는데, 사진은 초점이 안 맞아서 보이지 않지만 끝이 없는 오싹한 복도가 보였다.
- 원래 설명을 안하셨던 부분인데 설명을 듣던 한 분이 저 줄은 뭐냐고 질문해서 설명해주셨다. 저건 수감자들이 돌발 행동을 하는 경우를 대비해 깔아놓은 대책이다. 관리자가 저 전선을 툭 건드려 연결을 끊으면 순식간에 연락이 가는 식이다.
가이드 투어를 듣기로 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냥 텍스트만 읽는 것보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낫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것보다 진짜 사람이 말해주는 투어를 듣는 게 낫다. 왜냐면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몰입의 차원이 다르다. 가이드분들 중에 실제로 수감 경험이 있는 분도 계시다고 들었다. 영화 약속이 있어서 투어 중간에 나왔는데, 무리를 이탈해서 혼자 건물 밖으로 나오는 짧은 길이 소름 끼쳤다.
5시에 Kino central에서 영화를 보고, 호스텔 근처에서 봐둔 시리아 음식점 Aldimashqi에서 밥을 먹었다. 시리아와 멕시코 사이에 역사적으로 이민이 많았고 그래서 멕시코 음식의 영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먹은 메뉴의 이름도 ‘멕시카노’였다. 시리아 음식이라는 게 생소해서 먹으러 갔던 건데,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가장 싼 걸 시키느라 멕시카노를 시켰고 그냥 멕시코 음식 같아서 약간 실망했었지만 맛은 있었다!